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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s

한 번은 긴 호흡으로: 최진영 작가와의 인터뷰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는 쪽으로 써서, 왜곡된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에게 공평하게 발언권을 주는 것 같아요.

최진영의 장편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의 발췌 부분이 영문으로 번역되어 Words without Borders 이번 달 퀴어호에 실렸다. 6월 11일에 최진영 작가와 이소영 번역가가 합정역 근처 카페에 만나서 퀴어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기, 복수화자, 해피엔딩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되었으며 또한 편집, 요약됐다. (Read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is interview.) 

이: <해가 지는 곳으로> 작가의 글에서 ‘한번은 긴 호흡으로 써야 할 이야기였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다른 소설 작업 과정과 달랐던 이유가 따로 있었나요?

최: 제가 지난 몇몇 단편들과 장편에서 레즈비언 이야기를 쓰긴 했지만 전면에 내세운 적은 없거든요. 제 소설 속 레즈비언 커플이 제대로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요. <끝나지 않는 노래>라는 장편 소설에 수선이라는 인물이 레즈비언인데, 그 소설이 여성 삼대 이야기여서 수선의 사랑에만 집중하기는 힘들었어요. 수선은 제 엄마 세대예요. 지금 저희 세대 성소수자도 많은 억압과 차별을 당하는데 저희 윗세대는 어땠겠어요. 동성애는 거의 언급도 불가능한 분위기였겠죠. 그래서 그 소설에서는 전면에 내세울 수가 없었는데, 은퇴하기 전에 한 번은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를 중심으로 소설을 써보고 싶었어요.

이: 은퇴한다는 말을 꺼내시긴 너무 젊으신데요?

최: 전 언제나 은퇴를 생각합니다.(웃음) 마지막 소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해요. 은퇴하기 전에 꼭 쓰고 싶은 소설 중에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가 있었어요.

이: 작년 가을에 <딸에 대하여> 쓰신 김혜진 작가님과 같이 강연을 하셨다는 기사를 봤어요. <딸에 대하여>는 엄청 다른 성격의 소설이잖아요. 그래도 ‘퀴어 여성 소설’이라서 비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 김혜진 작가님 소설과 제 소설이 '젊은 작가 시리즈'로 비슷한 시기에 나왔고 소재도 비슷해서 두 소설을 묶어서 행사를 진행했는데요. 저는 되게 든든했었죠. 김혜진 작가님의 소설에도 레즈비언 커플이 나오는데 제 소설과는 색깔이랄까 분위기가 조금 다르잖아요. 저는 그저 ‘사랑’에만 집중하는 편이었고 김혜진 작가님 소설은 거의 '레즈비언 커플 한국 생존기' 같은 느낌이고요.

이: [엄마와 딸과 딸의 애인이 같이 사는] 그 집 구조나, 뭔가 갇혀 있는 느낌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작가님 책엔, 벌판이—

최: 저는 그냥 러시아로 보내버리죠.(웃음)

이: 그래도 아직 ‘퀴어 소설’이라고 같이 묶을 수 있어서 . . .

최: 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가 저는 되게 반갑죠. 저와 비슷한 젊은 여성분이 비슷한 소재의 글을 써서 함께 발표하고, 같이 인사를 드릴 수 있고, 거기에 관심을 가져주는 분들이 있고, 이런 분위기 자체가 반가워요. 그런 분위기에 힘을 얻은 측면도 있고요. 이런 소설로 전혀 소통이 안 되는 시대였다면 책이 나왔어도 사랑받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지금은 소수자, 여성 인권 문제가 부족하나마 이슈가 되고 있는 시기잖아요. <끝나지 않는 노래>는 2011년에 나왔는데, 그때는 그런 걸 써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거든요. 제 첫 번째 책 주인공도 소녀였고, 두 번째 책 주인공도 여성 삼대고 단편에서도 여성 화자를 많이 썼기 때문에 오히려 '왜 남자 화자 이야기는 쓰지 않느냐', '왜 이렇게 여자 이야기만 쓰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이: 근데 남자 작가한텐 그런 질문을 안 하잖아요.

최: 그래서 이상한 질문인 거죠. 왜 여성을 주인공으로 쓰느냐는 질문 자체가 이상한 거예요. 근데 그런 질문을 많이 받으니까 의식하게 됐어요. 남자 이야기를 더 써야 되나?(웃음) 제 소설에 제대로 된 남자가 안 나오니까요. 남자들은 자꾸 사고 치고 그러니까 . . . (웃음)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는 쪽으로 써서, 왜곡된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에게 공평하게 발언권을 주는 것 같아요.

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소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복수화자’로 이어지게 하는 구조인데요. 도리와 지나가 퀴어 당사자로서 말하는데, 여기서 [이성애자 엄마가 1인칭 화자로 나오는] <딸에 대하여>와 대비되죠. 전지적 시점 아닌, 1인칭 복수 화자로 쓰신 이유가 있으셨나요?

최: 솔직하게 대답하자면 . . . 저는 그런 방식이 제일 편하고 익숙해요. 지금까지 쓴 작품들을 보면, 한 명의 화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보다는 주요인물 모두가 1인칭으로 나오는 게 많거든요.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는 쪽으로 써서, 왜곡된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에게 공평하게 발언권을 주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그런 방법이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더 높여주기도 하고요.

이: 예외 하나가 생각나는데, 약간 스포일러라서 조심할게요. 도리와 지나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각각 한 문장을 서사하고 그 장면이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진행되잖아요. 여태까지는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다 1인칭으로 표현되다가, 감정적인 클라이맥스를 닿는 순간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서 의외였어요. ‘관음증’이란 특히 레즈비언 영화에 문제 되는 점인데, 여긴 전혀 그런 게 없었고, 도리와 지나 옆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그런 시선으로 안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최: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요.(웃음) 이 책을 쓰면서 작정했던 것 하나가 '행복하게 하자'였어요. 이전의 소설들은 결말이 비극적이었던 경우가 많고 그래서 자괴감이 깊었어요. 내가 보는 현실이 해피엔딩이 아닌데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만드는 게 거짓말 같았거든요. 거짓 희망을 주는 것 같았어요. 희망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기만 같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소설 안에서라도 뭔가 돌파구를 만들지 못하는 걸까'라는 자괴감이 있었죠. 내가 사랑하는 인물들을 지옥으로 끌어들이고, 불행하게 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도 있었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현실에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을 소설에서만큼은 끝까지 살리고 싶었어요.

이: 그런 고민의 흔적이 각각 인물의 내면에서 조금씩 드러나오는 것 같아요. 근데 결론적으로 희망적인 작품인 것 같아요. 저도 읽으면서 반성을 많이 했어요.(웃음)

최: 저도요. 제가 '현실에선 이게 불가능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느 날은 무척 모순인 것 같더라고요. '나는 소설을 쓰고 있으면서 왜 자꾸 현실에 얽매일까?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근데 이렇게 쓰니까 되긴 되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요. 읽으신 분들이 소설에서 희망을 찾아주시는 것도 굉장히 감사하고, 이제 거기서 더 나아가야죠. 이런 글을 쓰면서 이게 말이 되나라는 번뇌에 좀 덜 휘말릴 수 있도록, 또 읽으시는 분들도 자연스럽게 현실감과 희망을 소설에서 건져내실 수 있도록 사회가 변하면 좋겠어요.

이: 다른 인터뷰에서 코맥 매카시의 <로드>, 그리고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좋아하시고 <해가 지는 곳으로>를 쓰는데 영감을 받으셨다고 하셨더라고요. 못 읽어본 분들 위해 잠깐 소개해주실 수 있으세요?

최: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베트남으로 선교를 떠나는 이야기인데요. 그 소설이 짧은 서사로 진행되면서 아름다워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인물들은 아름답고 숭고하죠. 문장과 이야기와 분위기에 취해서 읽다보면 남는 것은, 전혀 사랑하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사랑이에요. 이 소설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제 소설에도 담고 싶었죠. <로드>에서는 재난 서사에서 제가 취할 수 있는, 닮고 싶은 걸 가져왔어요. <로드>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인데, 이 서사에서 주인공으로 여성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어요.

성직자도 사랑을 할 수 있고,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사랑할 수도 있고,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은 상태로 남녀 모두를 사랑할 수도 있어요. 

이: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검색해보니, 원래 제목이 <안남>이더라고요. 근데 번역본에서는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인 게 꽤 인상적이었어요. 번역된 제목을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어딘가요?

최: 그게 약간은 반어법 같은 느낌도 들어요. 선교사들이 낯선 베트남의 안남이란 곳으로 가는 건데, 그게 어떻게 보면 프랑스인에게는 한국의 고창이나 풍기 같은 느낌이랄까요?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으나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요. 사랑이라는 게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다다를 수 없는 것 같지만 우리는 갈 수 있어요. 다들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고 부정하기도 하잖아요. 이것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있을 것 같고요.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인물이 신부와 수녀인데 사랑하는 연인이 되거든요. 그들의 세계에서는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 된다는 게 말도 안 되는데, 사랑에 말도 안 되는 게 있나요.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사랑이란 없어요. 성직자도 사랑을 할 수 있고,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사랑할 수도 있고,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은 상태로 남녀 모두를 사랑할 수도 있고, 나이 차이가 20살, 30살 나도 사랑할 수 있어요. 죽기 하루 전에도 할 수 있는 게 사랑인데, 사람들은 어떤 사랑에 대해선 굉장히 경멸하고,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하고, 사랑이 아니라고 규정지으려고 하잖아요. 그런 것 자체가 되게 부당하지 않나요?

이: 소설 초반에서, 건지가 “모두가 공평하게 불행한 지금이 차라리 홀가분하게 느껴진다”고 말하잖아요. 건지의 가정생활에 대한 도리의 회상 뒤에 이런 말이 나오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근데 소설이 다른 사건들을 통해 보여주는 게, 법과 질서가 사라진 사회적인 분위기에서도 ‘공평하게’ 불행하지 않다는 거예요. 여성이라서 피해 입는 그런 것도 있고.

최: 10대 아이들이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걸 많이 들었어요. 제가 학원 강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중2, 중3 정도 되는 남자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그렇게 말했어요. '전쟁이라도 나면 좋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해요.

이: 왜요?

최: 아, 당장 내일 시험 치기 싫으니까.(웃음)

이: 너무 극단적이에요!

최: 근데 저는 대학 다닐 때도 그런 말을 들었어요.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고, 내일이 오는 게 싫고, 미래가 보이지 않고, 너무 절망스러울 때 그런 이야기들을 해요.

또 소설을 쓸 때는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얼마 전에 기억 났어요. 영화 공부하고 단편 영화도 찍으신 김지숙 감독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그 감독님의 첫 단편영화 등장인물이 청각장애인인데, 감독님께 들었던 인상적인 얘기가, 청인들이 생각하기에 농인의 소원은 귀가 들리는 것일 것 같잖아요. 근데 청각장애인분들은 세상 모든 사람의 귀가 안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 말을 듣고 되게 설득이 됐어요. 나는 이미 들리지 않는 세계를 살고 있고 그 세계에 익숙하다면 내가 갑자기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안 들리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걸 쟁취하기 위해 싸우지 않나요? 내가 여기서 더 나아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여성 인권이나 장애인 인권을 위한 싸움은 개인의 변화보다 모두에게 이 세계가 비슷해지길 원하는 싸움이잖아요.

이: 남성 인물들에게 이런 정치적인 대화가 반영된 느낌이에요. 특히 지나가 “아빠, 난 이미 개야. 여기서 난 이미 개야”라고 말해도, 아빠는 이해를 못 하잖아요.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기득권을 가진 아빠는 ‘새로운 국가의 주인’이 되니 뭐 그런 얘기를 하면서 딸이 왜 그걸 원하지 않는지 이해를 못하는 게, 뭔가 지금 한국 정치와 너무. . .

최: 내가 지금 너무 힘들어 죽겠는데 참으라고 하잖아요? 어떤 생존권은 늘 묵살당하고 있는데도 많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하고. 우리 모두 다 함께 잘 사는 세계를 위해서 참아라, 그렇게 희생을 당연히 요구하고. 그 말 자체가 모순인데. 그런 목소리죠, 아버지의 목소리는.

이: 현실감이 대단해요. 미래의 한국을 상상하는 소설이고, 다들 러시아에 있는데,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잘 담으신 것 같아요.

최: 저는 현실에 사니까요.

퀴어를 그냥 내민 것처럼 혼혈도 그냥 내밀고 싶었고, 장애도 그냥 내밀고 싶었어요. 그런 것에 어떤 설명을 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아! 궁금한 점이 있어요. 지나는 빨간 머리에 회색 눈을 가졌잖아요. 아주 나중에 도리가 왜 빨간지 궁금해하지만, 밝혀지지 않죠? 어떻게 된 건가요? 염색 머리인가요? 한국인이 아닌가요?

최: 제 설정으로 지나는 혼혈이에요. 조부모나 조상 누군가는 외국인인 건데, 그걸 설명하지 않았죠. 그 이유는 . . . 제 소설에서는 지나와 도리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퀴어를 그냥 내민 것처럼 혼혈도 그냥 내밀고 싶었고, 장애도 그냥 내밀고 싶었어요. 그런 것에 어떤 설명을 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미래의 한국이기도 하죠. 재난 사태까지 그동안 어떤 인구변화가 있을지 모르죠.

최: 그래서 그냥 설명을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었죠. 미소가 청작장애인이 된 '이유', 지나가 혼혈인 '이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냥 우리가 일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일뿐이죠. 그걸 굳이 설명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싶었어요.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노래] <마 렌디 뿌르 꼰뗀또>를 아침에 계속 듣고 왔거든요. 마지막 질문으로서 조금 이상하지만, 제일 좋아하시는 버전이나 가수가 있으신가요?

최: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많아요. 수화 내용도 그렇고 <마 렌디 뿌르 꼰뗀또>도 많은 성악가가 부른 노래지만 누가 부른 건지, 그런 기본적인 정보도 다 가렸어요. 제가 누구의 노래라고 말해버리면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 들을 것이고, 그 이미지가 딱 박혀버리잖아요. 그것보다는 그냥 각자의 버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같은 의미로 각자의 마음 속 도리와 지나가 다 달랐으면 좋겠어요.

English

최진영의 장편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의 발췌 부분이 영문으로 번역되어 Words without Borders 이번 달 퀴어호에 실렸다. 6월 11일에 최진영 작가와 이소영 번역가가 합정역 근처 카페에 만나서 퀴어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기, 복수화자, 해피엔딩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되었으며 또한 편집, 요약됐다. (Read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is interview.) 

이: <해가 지는 곳으로> 작가의 글에서 ‘한번은 긴 호흡으로 써야 할 이야기였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다른 소설 작업 과정과 달랐던 이유가 따로 있었나요?

최: 제가 지난 몇몇 단편들과 장편에서 레즈비언 이야기를 쓰긴 했지만 전면에 내세운 적은 없거든요. 제 소설 속 레즈비언 커플이 제대로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요. <끝나지 않는 노래>라는 장편 소설에 수선이라는 인물이 레즈비언인데, 그 소설이 여성 삼대 이야기여서 수선의 사랑에만 집중하기는 힘들었어요. 수선은 제 엄마 세대예요. 지금 저희 세대 성소수자도 많은 억압과 차별을 당하는데 저희 윗세대는 어땠겠어요. 동성애는 거의 언급도 불가능한 분위기였겠죠. 그래서 그 소설에서는 전면에 내세울 수가 없었는데, 은퇴하기 전에 한 번은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를 중심으로 소설을 써보고 싶었어요.

이: 은퇴한다는 말을 꺼내시긴 너무 젊으신데요?

최: 전 언제나 은퇴를 생각합니다.(웃음) 마지막 소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해요. 은퇴하기 전에 꼭 쓰고 싶은 소설 중에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가 있었어요.

이: 작년 가을에 <딸에 대하여> 쓰신 김혜진 작가님과 같이 강연을 하셨다는 기사를 봤어요. <딸에 대하여>는 엄청 다른 성격의 소설이잖아요. 그래도 ‘퀴어 여성 소설’이라서 비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 김혜진 작가님 소설과 제 소설이 '젊은 작가 시리즈'로 비슷한 시기에 나왔고 소재도 비슷해서 두 소설을 묶어서 행사를 진행했는데요. 저는 되게 든든했었죠. 김혜진 작가님의 소설에도 레즈비언 커플이 나오는데 제 소설과는 색깔이랄까 분위기가 조금 다르잖아요. 저는 그저 ‘사랑’에만 집중하는 편이었고 김혜진 작가님 소설은 거의 '레즈비언 커플 한국 생존기' 같은 느낌이고요.

이: [엄마와 딸과 딸의 애인이 같이 사는] 그 집 구조나, 뭔가 갇혀 있는 느낌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작가님 책엔, 벌판이—

최: 저는 그냥 러시아로 보내버리죠.(웃음)

이: 그래도 아직 ‘퀴어 소설’이라고 같이 묶을 수 있어서 . . .

최: 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가 저는 되게 반갑죠. 저와 비슷한 젊은 여성분이 비슷한 소재의 글을 써서 함께 발표하고, 같이 인사를 드릴 수 있고, 거기에 관심을 가져주는 분들이 있고, 이런 분위기 자체가 반가워요. 그런 분위기에 힘을 얻은 측면도 있고요. 이런 소설로 전혀 소통이 안 되는 시대였다면 책이 나왔어도 사랑받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지금은 소수자, 여성 인권 문제가 부족하나마 이슈가 되고 있는 시기잖아요. <끝나지 않는 노래>는 2011년에 나왔는데, 그때는 그런 걸 써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거든요. 제 첫 번째 책 주인공도 소녀였고, 두 번째 책 주인공도 여성 삼대고 단편에서도 여성 화자를 많이 썼기 때문에 오히려 '왜 남자 화자 이야기는 쓰지 않느냐', '왜 이렇게 여자 이야기만 쓰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이: 근데 남자 작가한텐 그런 질문을 안 하잖아요.

최: 그래서 이상한 질문인 거죠. 왜 여성을 주인공으로 쓰느냐는 질문 자체가 이상한 거예요. 근데 그런 질문을 많이 받으니까 의식하게 됐어요. 남자 이야기를 더 써야 되나?(웃음) 제 소설에 제대로 된 남자가 안 나오니까요. 남자들은 자꾸 사고 치고 그러니까 . . . (웃음)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는 쪽으로 써서, 왜곡된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에게 공평하게 발언권을 주는 것 같아요.

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소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복수화자’로 이어지게 하는 구조인데요. 도리와 지나가 퀴어 당사자로서 말하는데, 여기서 [이성애자 엄마가 1인칭 화자로 나오는] <딸에 대하여>와 대비되죠. 전지적 시점 아닌, 1인칭 복수 화자로 쓰신 이유가 있으셨나요?

최: 솔직하게 대답하자면 . . . 저는 그런 방식이 제일 편하고 익숙해요. 지금까지 쓴 작품들을 보면, 한 명의 화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보다는 주요인물 모두가 1인칭으로 나오는 게 많거든요.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는 쪽으로 써서, 왜곡된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에게 공평하게 발언권을 주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그런 방법이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더 높여주기도 하고요.

이: 예외 하나가 생각나는데, 약간 스포일러라서 조심할게요. 도리와 지나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각각 한 문장을 서사하고 그 장면이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진행되잖아요. 여태까지는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다 1인칭으로 표현되다가, 감정적인 클라이맥스를 닿는 순간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서 의외였어요. ‘관음증’이란 특히 레즈비언 영화에 문제 되는 점인데, 여긴 전혀 그런 게 없었고, 도리와 지나 옆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그런 시선으로 안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최: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요.(웃음) 이 책을 쓰면서 작정했던 것 하나가 '행복하게 하자'였어요. 이전의 소설들은 결말이 비극적이었던 경우가 많고 그래서 자괴감이 깊었어요. 내가 보는 현실이 해피엔딩이 아닌데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만드는 게 거짓말 같았거든요. 거짓 희망을 주는 것 같았어요. 희망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기만 같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소설 안에서라도 뭔가 돌파구를 만들지 못하는 걸까'라는 자괴감이 있었죠. 내가 사랑하는 인물들을 지옥으로 끌어들이고, 불행하게 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도 있었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현실에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을 소설에서만큼은 끝까지 살리고 싶었어요.

이: 그런 고민의 흔적이 각각 인물의 내면에서 조금씩 드러나오는 것 같아요. 근데 결론적으로 희망적인 작품인 것 같아요. 저도 읽으면서 반성을 많이 했어요.(웃음)

최: 저도요. 제가 '현실에선 이게 불가능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느 날은 무척 모순인 것 같더라고요. '나는 소설을 쓰고 있으면서 왜 자꾸 현실에 얽매일까?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근데 이렇게 쓰니까 되긴 되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요. 읽으신 분들이 소설에서 희망을 찾아주시는 것도 굉장히 감사하고, 이제 거기서 더 나아가야죠. 이런 글을 쓰면서 이게 말이 되나라는 번뇌에 좀 덜 휘말릴 수 있도록, 또 읽으시는 분들도 자연스럽게 현실감과 희망을 소설에서 건져내실 수 있도록 사회가 변하면 좋겠어요.

이: 다른 인터뷰에서 코맥 매카시의 <로드>, 그리고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좋아하시고 <해가 지는 곳으로>를 쓰는데 영감을 받으셨다고 하셨더라고요. 못 읽어본 분들 위해 잠깐 소개해주실 수 있으세요?

최: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베트남으로 선교를 떠나는 이야기인데요. 그 소설이 짧은 서사로 진행되면서 아름다워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인물들은 아름답고 숭고하죠. 문장과 이야기와 분위기에 취해서 읽다보면 남는 것은, 전혀 사랑하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사랑이에요. 이 소설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제 소설에도 담고 싶었죠. <로드>에서는 재난 서사에서 제가 취할 수 있는, 닮고 싶은 걸 가져왔어요. <로드>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인데, 이 서사에서 주인공으로 여성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어요.

성직자도 사랑을 할 수 있고,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사랑할 수도 있고,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은 상태로 남녀 모두를 사랑할 수도 있어요. 

이: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검색해보니, 원래 제목이 <안남>이더라고요. 근데 번역본에서는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인 게 꽤 인상적이었어요. 번역된 제목을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어딘가요?

최: 그게 약간은 반어법 같은 느낌도 들어요. 선교사들이 낯선 베트남의 안남이란 곳으로 가는 건데, 그게 어떻게 보면 프랑스인에게는 한국의 고창이나 풍기 같은 느낌이랄까요?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으나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요. 사랑이라는 게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다다를 수 없는 것 같지만 우리는 갈 수 있어요. 다들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고 부정하기도 하잖아요. 이것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있을 것 같고요.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인물이 신부와 수녀인데 사랑하는 연인이 되거든요. 그들의 세계에서는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 된다는 게 말도 안 되는데, 사랑에 말도 안 되는 게 있나요.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사랑이란 없어요. 성직자도 사랑을 할 수 있고,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사랑할 수도 있고,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은 상태로 남녀 모두를 사랑할 수도 있고, 나이 차이가 20살, 30살 나도 사랑할 수 있어요. 죽기 하루 전에도 할 수 있는 게 사랑인데, 사람들은 어떤 사랑에 대해선 굉장히 경멸하고,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하고, 사랑이 아니라고 규정지으려고 하잖아요. 그런 것 자체가 되게 부당하지 않나요?

이: 소설 초반에서, 건지가 “모두가 공평하게 불행한 지금이 차라리 홀가분하게 느껴진다”고 말하잖아요. 건지의 가정생활에 대한 도리의 회상 뒤에 이런 말이 나오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근데 소설이 다른 사건들을 통해 보여주는 게, 법과 질서가 사라진 사회적인 분위기에서도 ‘공평하게’ 불행하지 않다는 거예요. 여성이라서 피해 입는 그런 것도 있고.

최: 10대 아이들이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걸 많이 들었어요. 제가 학원 강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중2, 중3 정도 되는 남자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그렇게 말했어요. '전쟁이라도 나면 좋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해요.

이: 왜요?

최: 아, 당장 내일 시험 치기 싫으니까.(웃음)

이: 너무 극단적이에요!

최: 근데 저는 대학 다닐 때도 그런 말을 들었어요.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고, 내일이 오는 게 싫고, 미래가 보이지 않고, 너무 절망스러울 때 그런 이야기들을 해요.

또 소설을 쓸 때는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얼마 전에 기억 났어요. 영화 공부하고 단편 영화도 찍으신 김지숙 감독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그 감독님의 첫 단편영화 등장인물이 청각장애인인데, 감독님께 들었던 인상적인 얘기가, 청인들이 생각하기에 농인의 소원은 귀가 들리는 것일 것 같잖아요. 근데 청각장애인분들은 세상 모든 사람의 귀가 안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 말을 듣고 되게 설득이 됐어요. 나는 이미 들리지 않는 세계를 살고 있고 그 세계에 익숙하다면 내가 갑자기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안 들리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걸 쟁취하기 위해 싸우지 않나요? 내가 여기서 더 나아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여성 인권이나 장애인 인권을 위한 싸움은 개인의 변화보다 모두에게 이 세계가 비슷해지길 원하는 싸움이잖아요.

이: 남성 인물들에게 이런 정치적인 대화가 반영된 느낌이에요. 특히 지나가 “아빠, 난 이미 개야. 여기서 난 이미 개야”라고 말해도, 아빠는 이해를 못 하잖아요.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기득권을 가진 아빠는 ‘새로운 국가의 주인’이 되니 뭐 그런 얘기를 하면서 딸이 왜 그걸 원하지 않는지 이해를 못하는 게, 뭔가 지금 한국 정치와 너무. . .

최: 내가 지금 너무 힘들어 죽겠는데 참으라고 하잖아요? 어떤 생존권은 늘 묵살당하고 있는데도 많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하고. 우리 모두 다 함께 잘 사는 세계를 위해서 참아라, 그렇게 희생을 당연히 요구하고. 그 말 자체가 모순인데. 그런 목소리죠, 아버지의 목소리는.

이: 현실감이 대단해요. 미래의 한국을 상상하는 소설이고, 다들 러시아에 있는데,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잘 담으신 것 같아요.

최: 저는 현실에 사니까요.

퀴어를 그냥 내민 것처럼 혼혈도 그냥 내밀고 싶었고, 장애도 그냥 내밀고 싶었어요. 그런 것에 어떤 설명을 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아! 궁금한 점이 있어요. 지나는 빨간 머리에 회색 눈을 가졌잖아요. 아주 나중에 도리가 왜 빨간지 궁금해하지만, 밝혀지지 않죠? 어떻게 된 건가요? 염색 머리인가요? 한국인이 아닌가요?

최: 제 설정으로 지나는 혼혈이에요. 조부모나 조상 누군가는 외국인인 건데, 그걸 설명하지 않았죠. 그 이유는 . . . 제 소설에서는 지나와 도리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퀴어를 그냥 내민 것처럼 혼혈도 그냥 내밀고 싶었고, 장애도 그냥 내밀고 싶었어요. 그런 것에 어떤 설명을 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미래의 한국이기도 하죠. 재난 사태까지 그동안 어떤 인구변화가 있을지 모르죠.

최: 그래서 그냥 설명을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었죠. 미소가 청작장애인이 된 '이유', 지나가 혼혈인 '이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냥 우리가 일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일뿐이죠. 그걸 굳이 설명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싶었어요.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노래] <마 렌디 뿌르 꼰뗀또>를 아침에 계속 듣고 왔거든요. 마지막 질문으로서 조금 이상하지만, 제일 좋아하시는 버전이나 가수가 있으신가요?

최: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많아요. 수화 내용도 그렇고 <마 렌디 뿌르 꼰뗀또>도 많은 성악가가 부른 노래지만 누가 부른 건지, 그런 기본적인 정보도 다 가렸어요. 제가 누구의 노래라고 말해버리면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 들을 것이고, 그 이미지가 딱 박혀버리잖아요. 그것보다는 그냥 각자의 버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같은 의미로 각자의 마음 속 도리와 지나가 다 달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