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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에서 시작하기: 이혜미 작가와의 인터뷰

빠져들기 위해서는 수면에서 시작해야 해요.

이혜미의 시 <딸기잼이 있던 찬장>의 영문 번역이 Words without Borders 이번 달 퀴어호에 실렸다. 1년 가까이 이메일을 주고받다가 5월 11일에 이혜미 작가와 이소영 번역가가 망원동에서 만나서 초현실주의, 한국에 대한 편견, 단어 만들기, #문단_내_성폭력, 할머니 작가 되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되었으며 또한 편집, 요약됐다.

소영: 작가님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단어가 몇몇 있는데, 단어 연상 게임으로 인터뷰를 시작해보려고 해요. 예를 들어, ‘속눈썹하면 어떤 단어가 생각나시는지 바로 말씀해주시면 돼요. ‘속눈썹.’

혜미: 눈길.

소영: 수면.

혜미: 베개?

소영: 아, 물의 수면.

혜미: 물베개? (웃음)

소영: 눈빛.

혜미: 기척.  

소영: 자국.

혜미: 목련.

소영: 손가락.

혜미: 생채기.

소영: 일렁이는.

혜미: 오로라.

소영: 빛나는.

혜미: 팔레트.

소영: 뒤집는.

혜미: 진창.

소영: 무른.

혜미: 입술.

소영: 사라지는.

혜미: 발자국.

소영: 작가님 시는 초현실주의 그림 같아서 해보고 싶었어요. 전체를 이해하기 전에 한두 가지의 디테일을 먼저 인식하게 돼요. 그것도 깔끔하게, 논리적으로이해되지 않고, 꿈을 꾼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한국어로 읽을 때는 그냥 읽는데 영어로 옮기면서뭐지? 이게 말이 안 되는데?’ 하는 순간이 있어요. 방금 나온 단어 중에 부여 설명하시고 싶은 게 있나요?

혜미: 제가 시에서 자주 쓰는 단어들의 목록이 분명 있어요. 다양한 단어들을 쓰고 싶어서 최대한 그 목록을 피해서 쓰려 하죠. 그런데도 이렇게 많군요. 뭔가 들킨 기분이에요. (웃음)  ‘뒤집는’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몰랐어요.

소영: 다양하게 쓰시는 것 같은데요? <노팬티>에서는 꽃의 치마를 뒤집는 것도 있고, <다이버>에서는 바다를 뒤집는 것도 있고. 그리고 스쿠버 다이빙 하시는데 의외로잠수보다수면이나표면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쓰시더라고요. 이유가 있나요?

혜미: ‘잠수'라는 단어의 어감이 ‘수면’보다 별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잠수는 내려가서 이미 봐 버린 것인 상태잖아요. 이미 알아버린 것. 수면은 아직 모르는 것? 가능성이랄까. 상상의 여지가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알아버린 것보다는 알기 전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잠에도 빠져든다고 하고. 물에도 빠진다고 하고. 생각에도 빠진다고 하고. 다 빠져든다는 의미들이 있는 것 같아요. 수면은 우리가 빠져들기 전의 세계가 가지는 기다림이 담겨 있지요. 빠져들기 위해서는 수면에서 시작해야 해요.

소영: 신기한 게 몸에 대한 이미지는 많은데, 자신의 몸에 대해 얘기하는 것 보다 남의 손가락만 나오던지, 발자국만 나오던지, 몸의 일부만 나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혜미: 그런 것 같아요. 딱 그 단어가 아닌 주변부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자연스럽게 같이 그 단어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것을 좋아해요. 눈을 얘기하자면 눈썹을 얘기하고. 사랑 얘길 안하면서 사랑 얘기하고 싶고 그런건 있죠. 슬픔이란 말을 쓰지 않으면서도 슬픔을 얘기하고 싶고 그래요.

소영: 초현실주의는 파시즘을 저항하는 예술운동으로 시작되었잖아요. 근데 사실 여성작가보다 남성작가가 대표적으로 주목받고, 그들은 또 여성을 성적 뮤즈 취급하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작가님이 여성 작가로서 초현실주의의 마초성을 저항하는 점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요.

혜미: 기본적인 모든 ‘주의’가 주축이 되는 것들은 주로 남성, 혹은 권력에 치우치게 돼 있는데, 사실 그 ‘주의’가 가지게 된 폭력성을 어쨌든 극복하려는 것이 시 쓰기고 소수자들의 언어인 것이죠. 여성이란 단어를 걸지 않더라도 무슨 무슨 주의들을 파괴, 돌파해나가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요.

소영: 작가님 시가 지난 1년 동안 다양한 영어 잡지에 실렸는데, 제가 <뜻밖의 바닐라>를 소개하면서, “바닐라 표준을 빗나가면서 그 즐거움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저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선 BDSM이 이례적이라고 생각되지만, 작품세계에선 그 반대, ‘바닐라가 뜻밖이라서 재밌어요. 이제 작가님이 직접 시집 제목 설명해주실래요?

혜미: 지금 우리에게 당연시되는 것들이 먼 미래에 가면 아주 옛날의 것이 되거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상상을 좋아해요. ‘옛날에는 학교라는 곳에 갔대,’ 아니면 ‘옛날에는 여자가 직접 임신을 해서 애를 낳았대. 완전 야만적이지,’ 아니면 ‘옛날에는 직접 밥이란 걸 해서 먹었대’ 같은 이야기들. 지금만 봐도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전혀 안 당연해지고 있잖아요? 지금 한국에서도 직접 김치를 담가 먹는 데가 별로 없고, 고추장이나 간장 담는 데도 없고, 할머니가 식혜 만들어준 기억도 이제 없어지고 있는데. 뭔가 당연하다는 것을 계속 절대적인 기준으로 가져간다는 자체가 너무 보수적인 사고방식인 거죠. 지금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굉장히 좁은 정상의 범위, ‘바닐라’의 범위가 나중에는 정말 말도 안 되고 상상이 안되는 게 좋은 방향이 아닐까.

그 외에도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이미지. 달콤하고, 녹아내리고, 흐르고, 묻고. 끈적함과 단단함을 동시에 포함하는 바닐라가 좋아서 선택한 거죠.

소영: 딱 어울리는 것 같아요. 지난달 Asymptote에 소개했듯이, 특이한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되었어요. ‘바닐라'라는 단어를 보고설마…’ 하면서 책을 읽어갔는데 정말 <펨돔>이란 시가 있어서 신기했어요.

첫 번째 시집 <보라의 바깥>도 그렇고, 제목마다 뭔가 규범이나 표준을 벗어나는 뉘앙스를 가졌는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혜미: 그러게 말이에요. 몰랐는데 번역을 하다 보니 두 제목에 다 ‘바깥’을 의미하는 말이 들어 있었어요.  바깥을 방향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니라고 혹은 다른 방향이 있음을 자꾸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보라의 바깥>같은 경우는, 한참 색깔, 색채에 관심이 많았어요. 광선이나 빛의 파동은 어떻고, 자외선 적외선은 어떻고, 가시 광선의 영역이 어떻고.

자외선이 가진 재밌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아무 무늬가 없는 하얀 꽃인데 자외선 카메라로 찍으면 무늬가 엄청 화려하게 나타나는 꽃이 있어요. 꽃에 새겨진 무늬를 활주로라고 하죠. 일종의 과녁이에요. ‘여기에 꿀이 있습니다’라고 표시해둔 화살표 같은 거죠. 벌과 나비들은 그 활주로를 보고 꽃을 찾아가요. 그 표시가 우리 눈엔 안 보이는 거죠. <보라의 바깥> 표지가 나비잖아요. 보라의 바깥쪽을 볼 수 있는 존재죠.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들, 비가시적인 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을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소영: 작가님은 영어권 데뷔를 Modern Poetry in Translation 지난 여름 퀴어호에 하셨고, 또 지금 Words Without Borders 퀴어호에 나오실 거잖아요. 작가님께 첫 이메일 쓰면서 되게 조마조마했었는데 반가워해 주셔서 정말 기뻤어요. 작가님이나 작가님 글이퀴어맥락으로 읽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혜미: 사람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만으로 소비되는 것 또한 솔직히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죠. 사실 정체성이란 것은 정말로 너무나도 복잡하고 개인적이잖아요.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소개된 시들 또한 그러한 혼란의 와중들을 붙잡아서 쓴 것이에요. 제가 시 속에서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마련해 놓으면, 그걸 읽는 사람이 자신에게 대입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소영: 그게 이상적인 것 같아요. 근데 소수자로서 목소리를 내면서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긴 해서 복잡한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요즘 퀴어가 주제인 작품이나, 오픈리 퀴어인 작가들도 나오고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공공연한 비밀인 게 참 한국퀴어적인 것 같기도 해요

혜미: 경직된 사회인 게 확실해요. 그런 것들을 조금만 말해도 어머머 하고, 참 호들갑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게 뭐라고. ‘나랑 사귈 것 아니면 신경 쓰지 마.’ (웃음) 그렇게까지 남의 정체성을 알거나 간섭하려는 것 자체가 좀 폭력적인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까지 썼던 시들 중에서는 섹슈얼한 뉘앙스를 가진 것도 많고 사실 관심을 많이 가졌죠. 인간의 욕망, 사람이 어디까지 가는지. <펨돔>도 일종의 역할놀이로서 지배-피지배를 서로에게 경험하게 하잖아요. 그것이 성적 긴장을 유발하고요. 이런 것들은 사실 연인 관계이면서도 정치적 실천인 면이 있거든요.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성욕이 드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고.

소영: 근데 웃긴 게, 계속 과거형으로 얘기하세요.

혜미: 너무 그런 거에 빠졌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소영: ‘이제는 아니다선언하시는 건가요?

혜미: 지금은 다른걸… 요즘은 식물에 관심이 많습니다. 너무 순해졌나요. (웃음) 관심 분야가 생기면 꽤나 빠져드는 편이에요. 알아보고, 도감도 찾아보고.

소영: <딸기잼이 있던 찬장>, <펨돔> 같은 시를 쓰셔서 꽤 대담하시다고 생각하는데, 비평에선 그런 요소가 언급되지 않잖아요. 그게 진짜 신기해요.

혜미: 왜 그럴까?

소영: 제 질문이! 왜인 것 같아요?

혜미: 첫 시집의 비평들이 주로 ‘사랑’이라는 말들로 뭉뚱그려서 표현하곤 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사랑을 나눠요’라고 했을 때, 섹스라는 말을 안 쓰기 위해 그런 말을 쓴 거잖아요. 그렇게 알면서도 피해가는 느낌이 있긴 있었어요.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거대하고 모호하죠. 안에는 프렌들리함도 있고, 섹스도 있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비평에서 언급하기엔 사실 껄끄러운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죠. 아직까진 성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진지하지, 존엄하지 않은? 말하기 어려운? 그런 주제이기는 하니까요. 아예 그것으로 하나의 챕터를 할애해 버리지 않는 이상, 다루고 넘어가기 어렵지 않았을까.

보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그거잖아요. 자신이 뜻밖이 되는 걸. 

소영: 또 다르게 생각하자면, 이성애중심적 사회에선 퀴어나 BDSM이 아예 인식되지 않는 거 아닌가 싶어요. 영화 <아가씨>가 나왔을 때도자매애라고 해석이 되던지, 정말 안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혜미: 덮어버리려고 하는. 보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그거잖아요. 자신이 뜻밖이 되는 걸. 그래서 외면하고,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걸 어떻게든 규범 안에 넣으려고 하는.

소영: 제가 번역 작업을 시작했을 때 작가님 작품은 번역할 만큼한국적이지 않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혜미: (손 따옴표 따라하며) ‘한국적'이지 않다?

소영: 외국에선 뭔가이국적인 걸 원하는데, <뜻밖의 바닐라>는 그게 아니라서 성공하지 않을 거란 말이었죠.

혜미: 오리엔탈리즘?

소영: 네. 이제 와서 비웃기 딱 좋은 에피소드긴 한데, 한 번 만나서 토론해보고 싶었어요. 작가님만 아니라 요즘 젊은 작가들은 토속적인 느낌이 없다는 지적을 한국문단, 평론가로부터도 받잖아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혜미: 일단 제가 한복부터 입고 올게요. (웃음) 부채춤도 좀 춰야 되고. 스테레오타입이나 외국에게 보여주는 식의 “한국적”이 아닌 우리 스스로 한국만의 특색이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는 건 필요하겠죠. 그런데 제 시에 나름 한국적인 요소는 꽤 있어요. <펄럭이는 홍백기 아래>에선 한국 샤머니즘 같은 게 많이 있는데. ‘생나무를 태우면 이웃이 죽는다,’ ‘빨간색으로 글씨 쓰면 안 된다,’ 그런 한국적인 미신들에 시적인 면이 있거든요?

소영: 무당 깃발 나오고 그러는 시는 정말 충분히한국적이죠. (웃음) 근데 그걸 꼭 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한국적이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작가님은 또 국어국문과 학부 출신이고, 현재 박사 수료 과정을 마치셨잖아요.

혜미: 사실 국어국문학과 간 이유 자체가, 제가 모국어 사용자로서 국어국문학과 석사 박사까지 가면 한국어의 가장 정점을 찍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못된 생각이었죠! 더 깊숙해진 건 있죠, 높이는 못 올라갔어도. 모국어를 그렇게 깊게 볼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 많지 않잖아요. 글 옆에 있고 싶었던 거죠.

소영: 관심 있는 시대 있으세요?

혜미: 1950년대. 전쟁을 겪은 뒤의 작품들이에요. 어떻게 깨짐을 극복하는가에 대한. 빼앗기고 사라지고 허망한. 그런 감정들이 많이 담겨 있어요. 그러면서 완전 세기말 정서. ‘죽어버리자,’ 그런.

김구용이란 시인이 있어요. 불교적 세계관이 많이 등장하는데, 저는 불교가 가진 태도를 좋아하거든요. ‘어차피 인생은 고통이다.' (웃음) 아무것도 없다, 무다, 허망하다.

소영: 모든 것은 지나간다.

혜미: 우리는 잠깐의 수레바퀴일 뿐. 그리고 전 한국어가 나중에는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100년, 200년 뒤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어가 사라질 것 아니에요.

한국어만이 가진 방식으로 디테일함을 말할 수 있는 언어로 개발해 나가는 게 시인의 의무 아닐까? 시인의 전공은 국어국문학과가 아니라, 생각인 것 같아요. 

소영: 어떤 언어가 될 것 같아요?

혜미: 혼종의 언어가 되겠죠. 그때 되면 그 거대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을 것 아니에요? 한국어에서는 있는 것. 한국어만이 가진 방식으로 디테일함을 말할 수 있는 언어로 개발해 나가는 게 시인의 의무 아닐까? 시인의 전공은 국어국문학과가 아니라, 생각인 것 같아요. 생각을 모국어의 극한까지 밀어 올려서 표현하는 것? 그래서 시인은 일종의 언어 국가대표인 거죠. ‘나는 한국어로 여기까지 생각해봤다. 너는 영어로 어디까지 생각해봤니?’

음.. 그런데 외국인들이 보는 한국이란 무엇일까? 전쟁의 고통 속에서 아직 풀려 나오지 못한 불행한 반쪽 나라?

소영: 근데 또 바뀐 것 같아요. 케이팝 보면, 뭐 방탄소년단이 한복을 입고 SNL에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혜미: 케이팝이 주는 그런 느낌도 있어요. 흥겹고 세련되고 번쩍번쩍한? 싸이로 대표되는 흥의 민족? 근데 우리는 또 엄청난—

소영: 한을 가지고!

혜미: 이걸 어떻게 해야 해. (웃음) 왜 우리는 스스로를 ‘한의 민족’이라고 정의할까? 하긴 우리말에 슬픔에 관련된 단어가 굉장히 많죠. 희로애락으로 치면, ‘로'와 ‘애'의 단어가 엄청나게 개발되어 있고, ‘희'와 ‘락'에는 단어가 별로 없는 거예요.

소영: 제 생각엔 행복할 땐 그냥 행복하니까—  

혜미: 말이 필요 없는 거죠. 슬플 땐 내가 얼마큼 슬픈지, 굉장히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싶어하고, 남이랑 같은 말 쓰기 싫으니까. 근데 이게 우리나라만의 특색일까? 아마 독일어는 더 디테일할텐데?

소영: 그럼 작가님은 <뜻밖의 바닐라>가 희로애락 중에서 어떤 단어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혜미: 기쁘면서 슬픈 순간들을 많이 쓴 것 같아요. 너무 기쁘니까 이 기쁨이 사라질 것 같은 슬픔? 시집에 처음 나오는 시가 <비파나무가 켜진 여름>이고 여름이어서 서로 손깍지 끼고 걷는 얘긴데, 서로가 슬퍼질 것을 조금 예감하는 그런 얘기죠. 너무 빛나기 때문에 사라질 것을 예감하는. 녹기 전의 눈을 보면서 느끼는. 그런 걸 많이 쓴 것 같아요. 약간 기쁨의 세계 아닌가?

소영: 너무 슬프진 않은 것 같아요. 약간미래지향적인 슬픔? 인 것 같아요.

혜미: 오~~~ 좋다 좋다.

소영: 아직 없는 슬픔을 애도하는?

혜미: 지금이 좋아서, 이게 사라질까 슬픈. ‘지금 이게 너무 좋은데, 없어지면 어떡하지?’ 애인이랑도 그랬고.

소영: 연애할 때 특히 그런 것 같아요. (웃음)

혜미: ‘이것보다 좋을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 이제 절망만 남은 거 아냐?’ (웃음) 그런 두려움? 근데 어쨌든 지금의 좋음에 대한 감정에서 나오는 거라서.

소영: 문예창작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시는데, 본인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혜미: 아까 얘기했듯이 프로젝트를 같이 하고 그래요. 애들이 진짜 천재 같거든요. 일단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애들이니까. 얼마나 대단한지. 늘 자극도 많이 받고. 일부러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주제를 많이 내주죠. 최근엔 감정에 이름을 붙여 주는 수업을 했어요. 예를 들어서, ‘으야.’ 주말에 일어났는데 두시 반이고 내가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감정. ‘난 뭘하고 사는 건가.’ (웃음) 그 주말의 햇볕과 이불의 느낌이 다 합쳐진 단어에요. 아이들이 만든 단어 중에 ‘르극' 도 있었어요. 발을 헛디딜 뻔 했을 때 철렁, 하는 마음. 그리고 ‘토토.’ 어렸을 때 좋아했던 인형이 저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 보는 마음. 죄책감과 미안함이나 어렸을 적의 기억. ‘기쁨’, ‘슬픔’처럼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성품 단어들이 아닌 나만을 위해 직접 만든 ‘헨드메이드 감정의 이름’이에요. (웃음)

아무리 못난 케익을 구웠어도 케익을 구운 것은 케익을 굽지 않은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

소영: 진짜 재밌네요.

혜미: 재밌죠? 시 창작 수업 재밌게 하려고 노력하고 스스로도 엄청 즐겨요. 예고생이었고. 글 써보고 서로 얘기 나누는 걸 좋아해요. 그리고 혼을 별로 안 내거든요. 일단 ‘이걸 네가 썼어? 대단하네~’ 하는 스타일? 썼다는 자체가 일단 칭찬받아야 할 일이죠. 아무리 못난 케익을 구웠어도 케익을 구운 것은 케익을 굽지 않은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 네가 아무리 돌덩어리 같은 케익을 만들었어도 그 케익을 구우면서 맛있는 냄새를 맡았을 것이고, 예쁘게 데코레이션도 해봤을 것이고, 케익을 만드는 기쁨을 느끼지 않았겠니? 잘했다.

근데 또 너무 너그러워서 차별성이 없나? (웃음) 썼다는 자체가 일단 너무 기특해요! 좋고.

소영: 이건 전에도 살짝 얘기한 건데. 2017년 가을에 번역 작업을 시작했을 때, 작가님 이름을 검색해보고 #문단_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찾았었어요. 그 이후로 최영미 시인의 폭로와 소송이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추가적으로 말하고 싶은 거 있으세요?

혜미: 할 말은 정말 많죠. 일단 그때 제가 당했던 걸 얘기하자면, 제가 리스트를 뽑아보니까 25명 나왔다고 했잖아요. 허벅지 만진 거 그런 가벼운 건 다 빼고. 직접적인 성추행과 말들만 포함.

소영: 진짜요? 그건 몰랐네요.

혜미: 말로 성희롱한 것도 심한 것만 포함해서 정말 너그러이 따지면 50명 나오죠. 스스로  정리해 보려고 시작했던 글인데, 그렇게 퍼질 줄도 몰랐고. 일단 이런 얘기를 하면 ‘진짜요?’라는 반응이 나오는 시대가 돼서 너무 좋아요. 예전에는 ‘야 뭐 다 그런 거지. 말도 마, 누구는…’ 이게 기본이었어요. 못 믿고. [공론] 이런 게 계속되어야 후배들한테는 이런 일 없겠지. 옛날에 제사 지내는 게 당연했던 것처럼, 지금은 ‘으이구 제사 무슨 소리냐’ 그러잖아요.

소영: 다음 작품은 2년 뒤에 나올 거라고 하셨는데, 뭘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제목이나 내용에 대한 힌트를 주실 수 있나요?

혜미: 지금까지 한 것은 일종의 관계성에 계속 머물렀죠. 사이를 많이 봤던 것 같아요. <뜻밖의 바닐라>에서 액체성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으니까, 좀 다른 측면에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금 더 자신으로 들어가던가, 조금 더 ‘너'로 들어가 보거나. 이제 서로가 독립되어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관계에 의존하는 것도, 홀로서기 힘들어서 그런 거잖아요. 관계보다는 좀 더 홀로의 내면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어요.

소영: 약간 인터뷰 반칙인데, 여태까지 꼭 받고 싶었던 질문이 있나요?

혜미: 미래를 얘기할 때 얘기를 해보고 싶은 한 장면이 있어요. 소영씨 나이의 배낭객이 어느 유럽 쪽에 아주 조그만 시골 마을 헌책방에 가서 책을 하나 잡았는데 한쪽에 한국어, 한쪽에 영어인거예요. 굉장히 오래되고. 그런데 그 펼쳐보고 있는 사람이 내 손녀인거야!

소영: 오~~~

혜미: 할머니 시집을 찾은 거야! 이게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겠죠? 먼저 번역이 되어야 하고, 제가 결혼을 해서 애기도 낳아야 하고, 할머니가 되어야하고. 일단 소영씨가… (웃음)

소영: 아 번역이 나와야 되네요.

혜미: 여기에서 중요한 건 할머니 될 때까지 오래오래 써야 되겠죠.

소영: 정세랑 작가님도 그런 비슷한 말씀 하셨어요! 할머니 작가가 되고 싶으시다고.

혜미: 할머니 작가가 되려면 얼마나 어렵겠어요. 파이팅!

Read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is interview here.

English

이혜미의 시 <딸기잼이 있던 찬장>의 영문 번역이 Words without Borders 이번 달 퀴어호에 실렸다. 1년 가까이 이메일을 주고받다가 5월 11일에 이혜미 작가와 이소영 번역가가 망원동에서 만나서 초현실주의, 한국에 대한 편견, 단어 만들기, #문단_내_성폭력, 할머니 작가 되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되었으며 또한 편집, 요약됐다.

소영: 작가님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단어가 몇몇 있는데, 단어 연상 게임으로 인터뷰를 시작해보려고 해요. 예를 들어, ‘속눈썹하면 어떤 단어가 생각나시는지 바로 말씀해주시면 돼요. ‘속눈썹.’

혜미: 눈길.

소영: 수면.

혜미: 베개?

소영: 아, 물의 수면.

혜미: 물베개? (웃음)

소영: 눈빛.

혜미: 기척.  

소영: 자국.

혜미: 목련.

소영: 손가락.

혜미: 생채기.

소영: 일렁이는.

혜미: 오로라.

소영: 빛나는.

혜미: 팔레트.

소영: 뒤집는.

혜미: 진창.

소영: 무른.

혜미: 입술.

소영: 사라지는.

혜미: 발자국.

소영: 작가님 시는 초현실주의 그림 같아서 해보고 싶었어요. 전체를 이해하기 전에 한두 가지의 디테일을 먼저 인식하게 돼요. 그것도 깔끔하게, 논리적으로이해되지 않고, 꿈을 꾼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한국어로 읽을 때는 그냥 읽는데 영어로 옮기면서뭐지? 이게 말이 안 되는데?’ 하는 순간이 있어요. 방금 나온 단어 중에 부여 설명하시고 싶은 게 있나요?

혜미: 제가 시에서 자주 쓰는 단어들의 목록이 분명 있어요. 다양한 단어들을 쓰고 싶어서 최대한 그 목록을 피해서 쓰려 하죠. 그런데도 이렇게 많군요. 뭔가 들킨 기분이에요. (웃음)  ‘뒤집는’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몰랐어요.

소영: 다양하게 쓰시는 것 같은데요? <노팬티>에서는 꽃의 치마를 뒤집는 것도 있고, <다이버>에서는 바다를 뒤집는 것도 있고. 그리고 스쿠버 다이빙 하시는데 의외로잠수보다수면이나표면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쓰시더라고요. 이유가 있나요?

혜미: ‘잠수'라는 단어의 어감이 ‘수면’보다 별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잠수는 내려가서 이미 봐 버린 것인 상태잖아요. 이미 알아버린 것. 수면은 아직 모르는 것? 가능성이랄까. 상상의 여지가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알아버린 것보다는 알기 전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잠에도 빠져든다고 하고. 물에도 빠진다고 하고. 생각에도 빠진다고 하고. 다 빠져든다는 의미들이 있는 것 같아요. 수면은 우리가 빠져들기 전의 세계가 가지는 기다림이 담겨 있지요. 빠져들기 위해서는 수면에서 시작해야 해요.

소영: 신기한 게 몸에 대한 이미지는 많은데, 자신의 몸에 대해 얘기하는 것 보다 남의 손가락만 나오던지, 발자국만 나오던지, 몸의 일부만 나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혜미: 그런 것 같아요. 딱 그 단어가 아닌 주변부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자연스럽게 같이 그 단어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것을 좋아해요. 눈을 얘기하자면 눈썹을 얘기하고. 사랑 얘길 안하면서 사랑 얘기하고 싶고 그런건 있죠. 슬픔이란 말을 쓰지 않으면서도 슬픔을 얘기하고 싶고 그래요.

소영: 초현실주의는 파시즘을 저항하는 예술운동으로 시작되었잖아요. 근데 사실 여성작가보다 남성작가가 대표적으로 주목받고, 그들은 또 여성을 성적 뮤즈 취급하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작가님이 여성 작가로서 초현실주의의 마초성을 저항하는 점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요.

혜미: 기본적인 모든 ‘주의’가 주축이 되는 것들은 주로 남성, 혹은 권력에 치우치게 돼 있는데, 사실 그 ‘주의’가 가지게 된 폭력성을 어쨌든 극복하려는 것이 시 쓰기고 소수자들의 언어인 것이죠. 여성이란 단어를 걸지 않더라도 무슨 무슨 주의들을 파괴, 돌파해나가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요.

소영: 작가님 시가 지난 1년 동안 다양한 영어 잡지에 실렸는데, 제가 <뜻밖의 바닐라>를 소개하면서, “바닐라 표준을 빗나가면서 그 즐거움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저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선 BDSM이 이례적이라고 생각되지만, 작품세계에선 그 반대, ‘바닐라가 뜻밖이라서 재밌어요. 이제 작가님이 직접 시집 제목 설명해주실래요?

혜미: 지금 우리에게 당연시되는 것들이 먼 미래에 가면 아주 옛날의 것이 되거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상상을 좋아해요. ‘옛날에는 학교라는 곳에 갔대,’ 아니면 ‘옛날에는 여자가 직접 임신을 해서 애를 낳았대. 완전 야만적이지,’ 아니면 ‘옛날에는 직접 밥이란 걸 해서 먹었대’ 같은 이야기들. 지금만 봐도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전혀 안 당연해지고 있잖아요? 지금 한국에서도 직접 김치를 담가 먹는 데가 별로 없고, 고추장이나 간장 담는 데도 없고, 할머니가 식혜 만들어준 기억도 이제 없어지고 있는데. 뭔가 당연하다는 것을 계속 절대적인 기준으로 가져간다는 자체가 너무 보수적인 사고방식인 거죠. 지금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굉장히 좁은 정상의 범위, ‘바닐라’의 범위가 나중에는 정말 말도 안 되고 상상이 안되는 게 좋은 방향이 아닐까.

그 외에도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이미지. 달콤하고, 녹아내리고, 흐르고, 묻고. 끈적함과 단단함을 동시에 포함하는 바닐라가 좋아서 선택한 거죠.

소영: 딱 어울리는 것 같아요. 지난달 Asymptote에 소개했듯이, 특이한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되었어요. ‘바닐라'라는 단어를 보고설마…’ 하면서 책을 읽어갔는데 정말 <펨돔>이란 시가 있어서 신기했어요.

첫 번째 시집 <보라의 바깥>도 그렇고, 제목마다 뭔가 규범이나 표준을 벗어나는 뉘앙스를 가졌는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혜미: 그러게 말이에요. 몰랐는데 번역을 하다 보니 두 제목에 다 ‘바깥’을 의미하는 말이 들어 있었어요.  바깥을 방향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니라고 혹은 다른 방향이 있음을 자꾸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보라의 바깥>같은 경우는, 한참 색깔, 색채에 관심이 많았어요. 광선이나 빛의 파동은 어떻고, 자외선 적외선은 어떻고, 가시 광선의 영역이 어떻고.

자외선이 가진 재밌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아무 무늬가 없는 하얀 꽃인데 자외선 카메라로 찍으면 무늬가 엄청 화려하게 나타나는 꽃이 있어요. 꽃에 새겨진 무늬를 활주로라고 하죠. 일종의 과녁이에요. ‘여기에 꿀이 있습니다’라고 표시해둔 화살표 같은 거죠. 벌과 나비들은 그 활주로를 보고 꽃을 찾아가요. 그 표시가 우리 눈엔 안 보이는 거죠. <보라의 바깥> 표지가 나비잖아요. 보라의 바깥쪽을 볼 수 있는 존재죠.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들, 비가시적인 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을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소영: 작가님은 영어권 데뷔를 Modern Poetry in Translation 지난 여름 퀴어호에 하셨고, 또 지금 Words Without Borders 퀴어호에 나오실 거잖아요. 작가님께 첫 이메일 쓰면서 되게 조마조마했었는데 반가워해 주셔서 정말 기뻤어요. 작가님이나 작가님 글이퀴어맥락으로 읽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혜미: 사람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만으로 소비되는 것 또한 솔직히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죠. 사실 정체성이란 것은 정말로 너무나도 복잡하고 개인적이잖아요.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소개된 시들 또한 그러한 혼란의 와중들을 붙잡아서 쓴 것이에요. 제가 시 속에서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마련해 놓으면, 그걸 읽는 사람이 자신에게 대입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소영: 그게 이상적인 것 같아요. 근데 소수자로서 목소리를 내면서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긴 해서 복잡한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요즘 퀴어가 주제인 작품이나, 오픈리 퀴어인 작가들도 나오고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공공연한 비밀인 게 참 한국퀴어적인 것 같기도 해요

혜미: 경직된 사회인 게 확실해요. 그런 것들을 조금만 말해도 어머머 하고, 참 호들갑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게 뭐라고. ‘나랑 사귈 것 아니면 신경 쓰지 마.’ (웃음) 그렇게까지 남의 정체성을 알거나 간섭하려는 것 자체가 좀 폭력적인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까지 썼던 시들 중에서는 섹슈얼한 뉘앙스를 가진 것도 많고 사실 관심을 많이 가졌죠. 인간의 욕망, 사람이 어디까지 가는지. <펨돔>도 일종의 역할놀이로서 지배-피지배를 서로에게 경험하게 하잖아요. 그것이 성적 긴장을 유발하고요. 이런 것들은 사실 연인 관계이면서도 정치적 실천인 면이 있거든요.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성욕이 드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고.

소영: 근데 웃긴 게, 계속 과거형으로 얘기하세요.

혜미: 너무 그런 거에 빠졌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소영: ‘이제는 아니다선언하시는 건가요?

혜미: 지금은 다른걸… 요즘은 식물에 관심이 많습니다. 너무 순해졌나요. (웃음) 관심 분야가 생기면 꽤나 빠져드는 편이에요. 알아보고, 도감도 찾아보고.

소영: <딸기잼이 있던 찬장>, <펨돔> 같은 시를 쓰셔서 꽤 대담하시다고 생각하는데, 비평에선 그런 요소가 언급되지 않잖아요. 그게 진짜 신기해요.

혜미: 왜 그럴까?

소영: 제 질문이! 왜인 것 같아요?

혜미: 첫 시집의 비평들이 주로 ‘사랑’이라는 말들로 뭉뚱그려서 표현하곤 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사랑을 나눠요’라고 했을 때, 섹스라는 말을 안 쓰기 위해 그런 말을 쓴 거잖아요. 그렇게 알면서도 피해가는 느낌이 있긴 있었어요.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거대하고 모호하죠. 안에는 프렌들리함도 있고, 섹스도 있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비평에서 언급하기엔 사실 껄끄러운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죠. 아직까진 성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진지하지, 존엄하지 않은? 말하기 어려운? 그런 주제이기는 하니까요. 아예 그것으로 하나의 챕터를 할애해 버리지 않는 이상, 다루고 넘어가기 어렵지 않았을까.

보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그거잖아요. 자신이 뜻밖이 되는 걸. 

소영: 또 다르게 생각하자면, 이성애중심적 사회에선 퀴어나 BDSM이 아예 인식되지 않는 거 아닌가 싶어요. 영화 <아가씨>가 나왔을 때도자매애라고 해석이 되던지, 정말 안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혜미: 덮어버리려고 하는. 보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그거잖아요. 자신이 뜻밖이 되는 걸. 그래서 외면하고,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걸 어떻게든 규범 안에 넣으려고 하는.

소영: 제가 번역 작업을 시작했을 때 작가님 작품은 번역할 만큼한국적이지 않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혜미: (손 따옴표 따라하며) ‘한국적'이지 않다?

소영: 외국에선 뭔가이국적인 걸 원하는데, <뜻밖의 바닐라>는 그게 아니라서 성공하지 않을 거란 말이었죠.

혜미: 오리엔탈리즘?

소영: 네. 이제 와서 비웃기 딱 좋은 에피소드긴 한데, 한 번 만나서 토론해보고 싶었어요. 작가님만 아니라 요즘 젊은 작가들은 토속적인 느낌이 없다는 지적을 한국문단, 평론가로부터도 받잖아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혜미: 일단 제가 한복부터 입고 올게요. (웃음) 부채춤도 좀 춰야 되고. 스테레오타입이나 외국에게 보여주는 식의 “한국적”이 아닌 우리 스스로 한국만의 특색이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는 건 필요하겠죠. 그런데 제 시에 나름 한국적인 요소는 꽤 있어요. <펄럭이는 홍백기 아래>에선 한국 샤머니즘 같은 게 많이 있는데. ‘생나무를 태우면 이웃이 죽는다,’ ‘빨간색으로 글씨 쓰면 안 된다,’ 그런 한국적인 미신들에 시적인 면이 있거든요?

소영: 무당 깃발 나오고 그러는 시는 정말 충분히한국적이죠. (웃음) 근데 그걸 꼭 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한국적이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작가님은 또 국어국문과 학부 출신이고, 현재 박사 수료 과정을 마치셨잖아요.

혜미: 사실 국어국문학과 간 이유 자체가, 제가 모국어 사용자로서 국어국문학과 석사 박사까지 가면 한국어의 가장 정점을 찍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못된 생각이었죠! 더 깊숙해진 건 있죠, 높이는 못 올라갔어도. 모국어를 그렇게 깊게 볼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 많지 않잖아요. 글 옆에 있고 싶었던 거죠.

소영: 관심 있는 시대 있으세요?

혜미: 1950년대. 전쟁을 겪은 뒤의 작품들이에요. 어떻게 깨짐을 극복하는가에 대한. 빼앗기고 사라지고 허망한. 그런 감정들이 많이 담겨 있어요. 그러면서 완전 세기말 정서. ‘죽어버리자,’ 그런.

김구용이란 시인이 있어요. 불교적 세계관이 많이 등장하는데, 저는 불교가 가진 태도를 좋아하거든요. ‘어차피 인생은 고통이다.' (웃음) 아무것도 없다, 무다, 허망하다.

소영: 모든 것은 지나간다.

혜미: 우리는 잠깐의 수레바퀴일 뿐. 그리고 전 한국어가 나중에는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100년, 200년 뒤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어가 사라질 것 아니에요.

한국어만이 가진 방식으로 디테일함을 말할 수 있는 언어로 개발해 나가는 게 시인의 의무 아닐까? 시인의 전공은 국어국문학과가 아니라, 생각인 것 같아요. 

소영: 어떤 언어가 될 것 같아요?

혜미: 혼종의 언어가 되겠죠. 그때 되면 그 거대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을 것 아니에요? 한국어에서는 있는 것. 한국어만이 가진 방식으로 디테일함을 말할 수 있는 언어로 개발해 나가는 게 시인의 의무 아닐까? 시인의 전공은 국어국문학과가 아니라, 생각인 것 같아요. 생각을 모국어의 극한까지 밀어 올려서 표현하는 것? 그래서 시인은 일종의 언어 국가대표인 거죠. ‘나는 한국어로 여기까지 생각해봤다. 너는 영어로 어디까지 생각해봤니?’

음.. 그런데 외국인들이 보는 한국이란 무엇일까? 전쟁의 고통 속에서 아직 풀려 나오지 못한 불행한 반쪽 나라?

소영: 근데 또 바뀐 것 같아요. 케이팝 보면, 뭐 방탄소년단이 한복을 입고 SNL에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혜미: 케이팝이 주는 그런 느낌도 있어요. 흥겹고 세련되고 번쩍번쩍한? 싸이로 대표되는 흥의 민족? 근데 우리는 또 엄청난—

소영: 한을 가지고!

혜미: 이걸 어떻게 해야 해. (웃음) 왜 우리는 스스로를 ‘한의 민족’이라고 정의할까? 하긴 우리말에 슬픔에 관련된 단어가 굉장히 많죠. 희로애락으로 치면, ‘로'와 ‘애'의 단어가 엄청나게 개발되어 있고, ‘희'와 ‘락'에는 단어가 별로 없는 거예요.

소영: 제 생각엔 행복할 땐 그냥 행복하니까—  

혜미: 말이 필요 없는 거죠. 슬플 땐 내가 얼마큼 슬픈지, 굉장히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싶어하고, 남이랑 같은 말 쓰기 싫으니까. 근데 이게 우리나라만의 특색일까? 아마 독일어는 더 디테일할텐데?

소영: 그럼 작가님은 <뜻밖의 바닐라>가 희로애락 중에서 어떤 단어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혜미: 기쁘면서 슬픈 순간들을 많이 쓴 것 같아요. 너무 기쁘니까 이 기쁨이 사라질 것 같은 슬픔? 시집에 처음 나오는 시가 <비파나무가 켜진 여름>이고 여름이어서 서로 손깍지 끼고 걷는 얘긴데, 서로가 슬퍼질 것을 조금 예감하는 그런 얘기죠. 너무 빛나기 때문에 사라질 것을 예감하는. 녹기 전의 눈을 보면서 느끼는. 그런 걸 많이 쓴 것 같아요. 약간 기쁨의 세계 아닌가?

소영: 너무 슬프진 않은 것 같아요. 약간미래지향적인 슬픔? 인 것 같아요.

혜미: 오~~~ 좋다 좋다.

소영: 아직 없는 슬픔을 애도하는?

혜미: 지금이 좋아서, 이게 사라질까 슬픈. ‘지금 이게 너무 좋은데, 없어지면 어떡하지?’ 애인이랑도 그랬고.

소영: 연애할 때 특히 그런 것 같아요. (웃음)

혜미: ‘이것보다 좋을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 이제 절망만 남은 거 아냐?’ (웃음) 그런 두려움? 근데 어쨌든 지금의 좋음에 대한 감정에서 나오는 거라서.

소영: 문예창작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시는데, 본인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혜미: 아까 얘기했듯이 프로젝트를 같이 하고 그래요. 애들이 진짜 천재 같거든요. 일단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애들이니까. 얼마나 대단한지. 늘 자극도 많이 받고. 일부러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주제를 많이 내주죠. 최근엔 감정에 이름을 붙여 주는 수업을 했어요. 예를 들어서, ‘으야.’ 주말에 일어났는데 두시 반이고 내가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감정. ‘난 뭘하고 사는 건가.’ (웃음) 그 주말의 햇볕과 이불의 느낌이 다 합쳐진 단어에요. 아이들이 만든 단어 중에 ‘르극' 도 있었어요. 발을 헛디딜 뻔 했을 때 철렁, 하는 마음. 그리고 ‘토토.’ 어렸을 때 좋아했던 인형이 저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 보는 마음. 죄책감과 미안함이나 어렸을 적의 기억. ‘기쁨’, ‘슬픔’처럼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성품 단어들이 아닌 나만을 위해 직접 만든 ‘헨드메이드 감정의 이름’이에요. (웃음)

아무리 못난 케익을 구웠어도 케익을 구운 것은 케익을 굽지 않은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

소영: 진짜 재밌네요.

혜미: 재밌죠? 시 창작 수업 재밌게 하려고 노력하고 스스로도 엄청 즐겨요. 예고생이었고. 글 써보고 서로 얘기 나누는 걸 좋아해요. 그리고 혼을 별로 안 내거든요. 일단 ‘이걸 네가 썼어? 대단하네~’ 하는 스타일? 썼다는 자체가 일단 칭찬받아야 할 일이죠. 아무리 못난 케익을 구웠어도 케익을 구운 것은 케익을 굽지 않은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 네가 아무리 돌덩어리 같은 케익을 만들었어도 그 케익을 구우면서 맛있는 냄새를 맡았을 것이고, 예쁘게 데코레이션도 해봤을 것이고, 케익을 만드는 기쁨을 느끼지 않았겠니? 잘했다.

근데 또 너무 너그러워서 차별성이 없나? (웃음) 썼다는 자체가 일단 너무 기특해요! 좋고.

소영: 이건 전에도 살짝 얘기한 건데. 2017년 가을에 번역 작업을 시작했을 때, 작가님 이름을 검색해보고 #문단_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찾았었어요. 그 이후로 최영미 시인의 폭로와 소송이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추가적으로 말하고 싶은 거 있으세요?

혜미: 할 말은 정말 많죠. 일단 그때 제가 당했던 걸 얘기하자면, 제가 리스트를 뽑아보니까 25명 나왔다고 했잖아요. 허벅지 만진 거 그런 가벼운 건 다 빼고. 직접적인 성추행과 말들만 포함.

소영: 진짜요? 그건 몰랐네요.

혜미: 말로 성희롱한 것도 심한 것만 포함해서 정말 너그러이 따지면 50명 나오죠. 스스로  정리해 보려고 시작했던 글인데, 그렇게 퍼질 줄도 몰랐고. 일단 이런 얘기를 하면 ‘진짜요?’라는 반응이 나오는 시대가 돼서 너무 좋아요. 예전에는 ‘야 뭐 다 그런 거지. 말도 마, 누구는…’ 이게 기본이었어요. 못 믿고. [공론] 이런 게 계속되어야 후배들한테는 이런 일 없겠지. 옛날에 제사 지내는 게 당연했던 것처럼, 지금은 ‘으이구 제사 무슨 소리냐’ 그러잖아요.

소영: 다음 작품은 2년 뒤에 나올 거라고 하셨는데, 뭘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제목이나 내용에 대한 힌트를 주실 수 있나요?

혜미: 지금까지 한 것은 일종의 관계성에 계속 머물렀죠. 사이를 많이 봤던 것 같아요. <뜻밖의 바닐라>에서 액체성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으니까, 좀 다른 측면에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금 더 자신으로 들어가던가, 조금 더 ‘너'로 들어가 보거나. 이제 서로가 독립되어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관계에 의존하는 것도, 홀로서기 힘들어서 그런 거잖아요. 관계보다는 좀 더 홀로의 내면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어요.

소영: 약간 인터뷰 반칙인데, 여태까지 꼭 받고 싶었던 질문이 있나요?

혜미: 미래를 얘기할 때 얘기를 해보고 싶은 한 장면이 있어요. 소영씨 나이의 배낭객이 어느 유럽 쪽에 아주 조그만 시골 마을 헌책방에 가서 책을 하나 잡았는데 한쪽에 한국어, 한쪽에 영어인거예요. 굉장히 오래되고. 그런데 그 펼쳐보고 있는 사람이 내 손녀인거야!

소영: 오~~~

혜미: 할머니 시집을 찾은 거야! 이게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겠죠? 먼저 번역이 되어야 하고, 제가 결혼을 해서 애기도 낳아야 하고, 할머니가 되어야하고. 일단 소영씨가… (웃음)

소영: 아 번역이 나와야 되네요.

혜미: 여기에서 중요한 건 할머니 될 때까지 오래오래 써야 되겠죠.

소영: 정세랑 작가님도 그런 비슷한 말씀 하셨어요! 할머니 작가가 되고 싶으시다고.

혜미: 할머니 작가가 되려면 얼마나 어렵겠어요. 파이팅!

Read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is interview here.